정통파 인지심리학자로 알려진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의 책 <적정한 삶>은 인지심리학의 최근 연구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코로나 팬데믹 이후 변화의 소용돌이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혜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더 나은 인생을 열어주는 작지만 위대한 비밀
감정이 왜 중요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감정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내린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보이지 않게 감정이 개입한 결과이다.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 다스리는 것은 불쾌감을 피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다가 아니다. 우리가 감정을 알아야 하는 진짜 이유는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판단의 질을 향상해 탁월하고 유능한 인재가 되기 위함이다. 사람들 특히 촉이 좋다는 이들은 느낌이 좋으면 온 힘을 다해서 진행하고 뭔가 께름칙하면 잠시 멈추어서 살핀다. 얼핏 보면 비과학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그동안 축적된 경험적 데이터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제품 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요인이 다름 아닌 '감수성'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움직여서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은 디바이스에 대한 분석이나 경제적인 평가가 아니라 강력한 감정이다. 감정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금세기 최고의 혁신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뇌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활동을 명확히 인지하고 조절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 이것이 더 나은 일상과 인생을 열어주는 작지만 위대한 비밀이다.
불안의 역이용
불안 상태에 놓이면 큰 것은 눈에 안 들어오지만 작은 것들은 잘 보이게 된다. 작고 구체적인 것들이 쉽게 파악되는 게 '불안'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불안하게 되면 시야가 좁아진다. 그래서 불안한 사람에게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숨어 있는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지금 당신이 불안한 상태라면 크고 원대한 일 대신 세밀하고 정확하며 구체적인 일을 해보자고 생각한다면 아마 평소보다 훨씬 더 일이 잘 풀릴 것이다. 지금과 같이 팬데믹으로 인해 불안함을 느끼는 상황에서 조직의 리더가 원대한 비전과 사명감을 강조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업무를 작고 구체적으로 쪼개는 게 현명하다. 예를 들어서, 그날 해야 할 일이 10이라면 3/3/3으로 자르고 그때그때 피드백을 하는 것이 좋다. 그때그때 전달받은 작은 일을 완수했을 때의 성취감은 무시하기 어렵다. 1+1+1+1은 4이다. 그런데 심리의 눈으로 보면 4가 아니라 8이나 12, 16이 되는 경우도 많다. 성취감이나 행복은 크기보다 빈도가 더 중요하다. 10점짜리 행복을 한 달에 한 번 느끼는 사람보다 3점이나 4점짜리 행복을 일주일마다 느끼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자질구레한 행복의 경험을 여러 번 축적하는 게 좋다고 주장한다.
인정투쟁에서 벗어나는 삶
'인정투쟁'이란 용어는 헤겔 철학에서 시작된 말로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싸움을 뜻한다. 한 주체는 다른 주체에게 인정을 받을 때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며, 이 획득한 정체성은 더 높은 인정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훈 박사는 인정투쟁에 빠진 우리 사회를 '남의 감탄에 목말라하는 사회'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의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진 뒤에 이전과 같은 접촉의 일상보다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그 결과로 우리의 삶도 점차 인정 투쟁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변화의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저자는 남이 하는 감탄을 '내가 하는 감탄'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일단 자신에게 충실해야 한다. 자기 충실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문화심리학에서는 딱 짚어서 미학적 경험, 예술적 경험이라고 알려준다. 즉, 내 몸을 움직여서 아름다움을 창조하라는 것이다. 내가 직접 써보고, 그려보고, 연주하는 예술 체험은 앞으로 아주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문화적 체험은 나를 풍부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삶의 안전 장치이자 행복의 지향점이 될 수 있다.
성격이 아니라 인격이다 : 인간의 여섯 번째 성격
모든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1위가 성격 차이이다. 성격이 너무 달라도 문제지만 같다고 해서 늘 좋은 건 아니다. 그리고 성격은 절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성격이란 개인을 특징짓는 지속적이고 일관된 행동 양식을 말한다. 성격 심리학자들은 성격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으로 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우호성, 신경성의 다섯 가지를 꼽는다. 그런데 최근 심리학에서는 이 5가지로만 정의 내릴 수 없는 성격의 다른 차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격 모델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여섯 번째 요소는 바로 정직-겸손성이다. 심리학의 많은 연구가 성격은 태아 시절 호르몬에 영향을 받아 선천적으로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섯 번째 성격은 후천적인 영향이 크다. 저자는 다섯 가지 성격 요인에 정직-겸손성이 합해졌을 때 성격을 넘어선 인격 혹은 성품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정직-겸손성의 인정은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인간을 보는 대표적 이론으로 인간관계의 골치 아픈 순간마다 교양과 배려와 경청의 지혜를 통해서 인간관계를 더 깊고 넓게 만든다.
이타성, 역량이 되다 : 상위 0.1%의 비밀
몇 해 전 EBS에서 대한민국 학력 상위 0.1%를 차지하는 학생들이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무엇이 다른지 알아보는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방영했다. 제작진들은 아이들의 IQ, 성격, 부모, 소득을 비교해서 분석했지만 눈에 띄게 다른 점을 찾지는 못했다. 그런데 한 가지 엉뚱한 부분에서 상위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높은 점수를 보이는 지점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타성'이었다. 왜 이타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점점 더 지혜로워지고 통찰력을 갖게 되는가에 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심리학자들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했다. 이 비밀은 바로 '대화와 질문의 힘'에 있었다. 이타적인 사람은 나와 격차가 많이 벌어진 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여러 번 설명하고 자신에게 어떤 질문도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다. 세계의 인지심리학자들은 뛰어난 전문가들이 평범한 전문가들과 어떤 지점에서 차이가 있었는지를 실리콘밸리, 월스트리트, 나사 등 다양한 곳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연구해 왔다. 모든 연구에서 예외 없이 발견되는 특징은 자기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자주 자신들의 이야기를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해 준다는 것이었다. 상대에게 쉬운 말로 설명하는 것 즉, 자신의 지식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은 지식을 '지혜'로 바꾸는 과정이다. 윤리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이 더 똑똑해지고 지혜로워지는 비밀은 여기에 있다.
<적정한 삶>의 시대 : 'Want'에서 'Like'로!
저자는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우리 사회가 만족감이 지혜로워지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의 삶을 행복하게 이어가려면 나의 만족감에 대해 반드시 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족감이란 질주하는 인간을 멈출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안전 장치이다. 만족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인정이 아닌 '나의 보람'이다. 저자는 만족의 기준이 '원트(Want)'에서 '라이크(Like)'로 바뀔 것이라고 강조한다. 원트와 라이크는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원트가 사회적으로 추구하도록 자극받아 온 것이라면 라이크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다. 라이크에 민감해지면 작은 변화에도 크게 감탄한다. 즉, 나의 경험 나의 보람이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행복의 동력이자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더 나은 삶과 원대한 신념을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적정한 삶의 지혜라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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